사람의 일생이 정직한가 정직하지 않은가를 준별하는 기준은 ‘간첩’과 ‘선비’. 어울리지 않아 보이는 두 단어이지만, 노촌의 삶은 이 둘 사이를 오간 ‘한국 근현대사의 생생한 증언’ 그 자체이다. 노촌을 얘기할 때 흔히 붙는 수식어는 ‘남파공작원 출신으로 22년간 복역한 한학자’다. 한국전쟁 때 월북한 그는 1958년 남한 내에 “당이 일할 공간을 만들러” 내려왔다가 군산 앞바다에서 북으로 돌아가는 공작선 접선에 실패하고 경찰에 체포됐다. 이 때 그를 체포한 경찰관이 일제 때 그를 고문했던 바로 그 경찰관이었다는 사실은 한국 현대사의 아이러니를 웅변한다. 1920년 충북 제천의 부잣집에서 태어난 노촌은 학교를 다니지 않고 부친 밑에서 한학을 공부했다. 그는 조선 중기 4대 문장가로 월사 이정귀를 비롯, 내리 3대째 대제학을 배출한 명문가인 연안 이씨 집안의 13대 종손이다. ‘글방도령’이었던 그가 세상에 눈을 뜬 것은 서울 영창학교에 입학한 18세 때. 그는 일본어로 된 ‘빈보 모노가타리(가난 이야기)’를 접하며 사회주의에 입문했다. 생전 그는 KBS와의 인터뷰에서 “내 주변의 많은 사람들은 왜 이렇게 가난한가. 조선이 가난에서 벗어나는 길은 ‘사회주의’라고 생각했다”고 털어놨다. 노촌은 의병에 투신한 부친과 숙부, 그리고 고향의 친척 아저씨뻘 되는 벽초 홍명희의 영향으로 식민지 치하에서 강한 민족의식을 갖게 됐다. 1943년에는 독서회 사건에 연루돼 1년간 옥고를 치렀으며, 해방공간에는 사회주의 계열에 참여해 활동하다가 한국전쟁 시기에 월북했다. 남파 후 본인 표현대로 “제대로 공작도 못해 보고” 잡혀 무기징역형을 선고받은 그가 수감된 곳은 일제 때부터 사상범을 수용해온 대전교도소다. 0.75평 독방에 갇혀 “언어를 잃어버리지 않기 위해 벽에 대고 계속 말을 해야 했다”는 그는 70년대 초 계속되는 고문으로 40㎏도 안되는 몸을 노모 앞에 보인 불효를 참지 못하고 전향서에 서명하고 말았다. 감옥에서 집필과 공부가 허락된 그가 귀의한 것은 영원한 마음의 고향인 한학이다. 붓을 다시 든 것도 이즈음이다. 복역 17년 되던 해. 육사 교관이던 신영복씨가 1975년 통혁당 사건에 연루돼 대전교도소에 들어왔다. 4년간 노촌과 한 방을 쓴 신영복씨는 그로부터 한학과 서예를 익히는 한편 생활 모습과 생각에 많은 감화를 받았다. 신영복 교수는 그의 저서 ‘강의’의 앞의 상당 부분을 ‘노촌과의 인연’에 할애했다. “당신이 그토록 괴로운 상황에서도 동료 재소자는 물론, 찾아오는 교도관에게까지 일일이 처방을 일러주고 침을 놓아주었는데 그 바늘은 언제나 국어사전 290쪽에 감춰두었다. 선생님의 함자가 숫자로 ‘290’인 점을 생각하면서 지금도 국어사전을 손에 들 때면 공연히 290쪽을 열어 선생님의 넉넉함을 떠올린다.” 그는 장기수로 복역하는 동안 신영복 교수 외에도 심지연 경남대 교수를 비롯한 시국사건 투옥자들을 제자로 거느리며 그들에게 한문과 서예를 가르쳤다. 1980년 출소한 노촌은 인사동에 이문학회(以文學會)라는 공부 모임을 만들어 후학 양성에 힘썼다. 한명숙 국무총리의 남편 박성준 성공회대 교수, 김명호 성균관대 교수, 문우서림 김영복 대표 등이 그의 문하를 넘나들었다. 노촌은 또한 번역과 집필에 몰두하여 ‘연행만초’ ‘역사는 남북을 묻지 않는다’ 등의 저서와 ‘호서의병사적’ ‘이강년선생문집’ 등의 역서를 내기도 했다. 지난해에는 서예작품전을 열었으며 올 3월에는 집안에 전해온 고문서와 의병독립운동 자료 등 6,000여점을 제천 의병도서관에 기증했다. 경향신문 2006. 10.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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