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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화상(서정주)

김중훈 2010. 9. 12. 22:52

自畵像

                                                                                                                          서정주

 

애비는 종이었다.

밤이 깊도록 오지 않았다.

파뿌리같이 늙은 할머니와 대추꽃이 한 주 서 있을 뿐이었다.

어매는 달을 두고 풋살구가 꼭 하나만 먹고 싶다하였으나...

흙으로 바람벽한 호롱불밑에 손톱이 까만 에미의 아들.

갑오년이라든가 바다에 나가서는 돌아오지 않는다하는 할아버지의 숱많은 머리털과 그 커다란

눈이 나는 닮았다한다.

 

스물 세해 동안 나를 키운 건 팔할이 바람이다.

세상은 가도 가도 부끄럽기만 하더라.

어떤 이는 내 눈에서 죄인을 읽고 가고.

어떤 이는 내 입에서 天痴를 읽고 가나

나는 아무것도 뉘우치진 않으련다.

 

찬란히 틔어오는 어느 아침에도

이마 위에얹힌 詩의 이슬에는

몇방울의 피가 언제나 섞여 있어

볕이거나 그늘이거나 혓바닥 늘어뜨린

병든 수캐마냥 헐떡거리며 나는 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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